전북도, ‘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 학술대회 개최
이번에 개최되는 학술대회는 지난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내 1층 심주석에서 금동사리호를 비롯한 사리봉안기, 은제관식 등 683점의 국보급 유물 발견 후, 3월 31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주관한 금동사리호 개봉 결과 금제사리호 내호에서 사리 12과를 비롯 다량의 유리구슬 등이 추가로 수습됨으로써, 그 어느때 보다도 익산 미륵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륵사지와 백제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성과를 재검토하고, 나아가 미륵사의 위상과 익산역사유적 지역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는 차원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사리장엄이란 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리를 넣는 사리병(호)과 그것을 장식하기 위한 각종 공양물과 그 내력을 적은 기록 등 사리와 함께 넣어지는 각종 물품을 가리킨다. 사리가 부처님의 몸에 나온 것인 만큼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져 정성을 다해 탑에 봉안됐으며 그와 함께 공양되는 장엄도 당대의 대표적인 국보급 예술품들이었다.
700여 점의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사리를 넣은 금동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였다. 특히 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적덕(沙宅[乇]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이하 사택씨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己亥)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삼국유사』 무왕(武王)조의 기록에 따라 백제 무왕 때(600~640) 왕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에 의해 미륵사가 창건된 것으로 이해해 왔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진평왕의 딸) 사이의 낭만적인 혼인설화와 함께 미륵사의 창건이 선화공주의 발원(發願)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씨가 왕후로 보이는데다가 또 그녀에 의해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 대해서는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시기라는 점에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의문이 종종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 사리봉안기의 출토로 인해 『삼국유사』 무왕조의 사료 가치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요즘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와 사리봉안기 두 기록의 차이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사리봉안기에 의거해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적인 내용으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여전히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과 미륵사지에 대한 고고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륵사는 서쪽-중앙-동쪽에 3개의 가람이 한 곳에 모여 있는 3원(院) 구조였는데 이번에 사리봉안기가 출토된 석탑은 서원(西院)의 탑이므로 사택씨 왕후가 세운 가람은 서쪽 가람이며, 나머지 중앙과 동쪽에 선화공주가 창건한 가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리봉안기에 주목하는 쪽에서는 사택씨 왕후가 세운 가람은 단지 서원만이 아니라 미륵사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에서 1370년 만에 출토된 백제 사리장엄의 국보급 가치와 함께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둘러싼 학계의 뜨거운 논쟁으로 인해 미륵사지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점점 높아가고 있는 추세다. 미륵사지 사리장엄 출토 이후 3월 14일에는 한국사상사학회가, 3월 21일에는 신라시학회가, 4월 24~25일에는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백제학회가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열띤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동일한 주제에 대해 학술대회 연속 개최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익산 미륵사지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폭발적이라 할 만하다. 미륵사지석탑 출토 사리장엄이 가지는 폭발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열띤 토론에도 불구하고 미륵사의 창건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계의 의견이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개최된 학술대회에서는 주로 문헌사료를 연구하는 고대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삼국유사』와 사리봉안기의 해석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져 왔다. 비슷한 연구방법론을 취하는 연구자들이 한 데 모여 논쟁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때문에 새로운 방향의 논의를 위해서는 고대사뿐만 아니라 고고학, 미술사, 국문학을 전공하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같이 모여서 다각도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5월 16일 전라북도·익산시와 고려사학회가 공동 주최하는 “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 학술대회는 기존 학술대회와 차별화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몇 차례 학술대회에서 반복된 미륵사 창건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미륵사지의 의의에 대해 고대사, 고고학, 미술사, 국문학의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각도에서 좀 더 폭 넓게 접근해 보는 것이다.
미술사 전공자인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은 사리장엄의 출토 과정과 봉안 상태에 대해 조사 당시 촬영한 생생한 사진 자료를 통해 소개하고,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에서 출토된 「창왕명(昌王銘) 사리감(舍利龕)」, 2007년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에서 출토된 목탑 사리장엄에 이어 이번에 출토된 미륵사지 사리장엄은 백제 사리장엄의 전개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특히 공예사적인 의의와 함께 사리봉안 의례와 관련된 의의에 대해서 발표한다.
고대사 전공자인 박현숙 고려대 교수는 그동안 학계의 논의가 선화공주와 사택씨 왕후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던 데서 벗어나, 미륵사 건립의 주체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미륵사는 무왕대에 시작하여 의자왕대에 완공되었다고 보면서, 『삼국유사』에 의해 창건의 실질적인 주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무왕이며, 사리봉안기에 의해 무왕 말년에는 사택씨 왕후가 석탑이 있는 서쪽 가람을 세우고, 또 의자왕대에 동탑이 있는 동쪽 가람이 완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박 교수는 『일본서기』사명천황(舒明天皇) 11년(639)조에 나오는 백제궁·백제사 창건 기록을 소개하면서 무왕의 익산 경영 및 미륵사 창건과 관련해 주목해 보았는데, 무왕과 같이 사명천황도 639년에 사찰을 창건하였고 또 2년 뒤인 641년 같은 해에 두 왕이 사망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료라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기록으로 향후의 논의에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그동안 고대사 전공자를 대표해 여러 번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김상현 동국대 교수도 미륵사지 창건 주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무왕대 불교계의 동향과 관련해 보완 발표하게 된다. 김교수는 사리봉안기에 입각해 볼 때 미륵사의 발원자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로 서원(西院)만을 창건한 것이 아니라 미륵사 전체를 창건한 것이며,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경주 불국사의 동·서탑 중수기록을 참고해 보면 두 탑이 모두 김대성(金大城)의 주도하에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고고학 전공자인 양정석 수원대 교수는 1970년대 이후 최근까지 진행된 미륵사지 탑지(塔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과정을 검토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확인한다. 동탑지에 대한 조사보고서는 석탑의 구조적인 차이를 바탕으로 동탑과 서탑의 조영시기가 다르다는 점에 주안점이 있었던데 반해, 서탑지 조사보고서에서는 석탑을 조영하는 방식에서 동·서탑이 동일한 방식으로 조영되었을 가능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즉 동일한 유적에 대해서도 조사기간이 장기간에 걸치면서 전혀 다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륵사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과정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문학 전공자인 나경수 전남대 교수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서 무왕을 ‘무강왕(武康王)’이라고도 했던 다른 기록의 존재에 주목하여, 『고려사』 지리지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는 익산지역의 무강왕전설과 연결해 무왕의 서동설화 속에는 마한의 무강왕 즉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그 배경으로 투영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리봉안기에서 법왕(석가모니)이 원경(遠景)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파악한다. 서동설화 속에 마한의 무강왕과 백제의 무왕이 혼동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의도적인 것일 수 있는데, 이것은 백제 말기에 마한을 백제의 정통으로 엮고자 했던 정치세력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나교수의 이해는 서동설화에 대한 기존 고대사학계의 인식 틀과 많이 다른 것으로 향후 어떤 토론이 이어질지 기대된다.
앞으로, 전라북도는 지속적인 학술대회 추진으로 익산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국립박물관 승격,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리장엄 등 출토유물의 전라북도내 전시·보관 등 8대 중점시책을 적극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전라북도청 개요
전라북도청은 186만 도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으로, 2014년 당선된 송하진 도시자가 도정을 이끌고 있다. 송하진 도지사는 한국 속의 한국, 생동하는 전라북도를 토대로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 창의롭고 멋스런 문화, 알뜰하게 커가는 경제, 따뜻하고 정다운 복지, 아름답고 청정한 환경을 도정방침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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